진짜 테킬라의 시대_2024 유행 통신
재난과 위기가 계속 발생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불확실한 시대지만, 일상은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향유하고 나눈다. 건축, 출판, 영화, 연극, 여행, 미술, 사회운동, 스포츠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이 업계의 흐름 혹은 작지만 확실한 변화를 이야기한다. 삶을 즐기고 더 낫게 바꾸려는 의지가 구현한 판에서 함께 놀고 싶어진다. 이 기사는 유행을 따르자는 의미가 아니다.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볍게 관찰하고, 그 안에서 새로운 취향 혹은 재밋거리를 발견할 수 있길 바란다.
소싯적 테킬라를 마시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던 기억이 있다면, 놀라지 마라. 우리에게 편견과 숙취를 안긴 그 시절 테킬라가 진짜가 아니었단 사실에. 그것은 안타깝게도 ‘믹스토 테킬라’였다. 최소 51%의 블루아가베당에 사탕수수당, 콘시럽 등을 섞어 만든 술이다. 거기에 색소나 향료를 넣는 것도 용인된 반쪽짜리 테킬라였던 것. 그렇다고 나쁜 술은 아니다. 그보다 더 근본 없는 술도 많으니. 다만 믹스토 테킬라는 고도수의 증류주치고 마시기 편하며, 고개를 젖혀 한입에 털어 넣고 소금과 레몬즙을 핥아 먹는 행위가 재미있어 다른 술보다 더 빨리, 더 많이 마시게 된다. “믹스토 테킬라를 마시고 끔찍한 숙취에 시달린 건 품질 문제만은 아니었을 거예요. 맛있다고 너무 많이 마신 탓이 클 거예요.” ‘바 참’ 임병진 바텐더의 말을 들으니, 언젠가 이연복 셰프가 들려준 얘기가 떠오른다. 짜장면과 짬뽕 먹으면 졸린 이유가 MSG가 많이 들어서라고 하는데, 아니라고, 맛있다고 과식한 결과라고 말이다. 맞다. 그 시절 테킬라는 숙취를 감안하고도 퍼마실 정도로 맛있긴 했다.
그렇다면 진짜 테킬라는 뭘까. 멕시코에서도 타바스코주에서 100% 블루아가베로 만든 증류주다. 아가베는 알로에와 비슷하게 생긴 다육식물이며, 블루아가베는 아가베의 특정 품종을 뜻한다. 사방으로 뻗은 굵고 억센 잎을 자르고 뿌리를 뽑으면, 그 속에 양분을 품은 구근이 등장한다. ‘아가베 시럽’은 많이 들어봤을 거다. 구근에 든 수액을 졸여 만든 시럽이다. 그만큼 당분이 높다. 테킬라는 아가베 중에서도 당도가 높은 블루아가베의 구근만 모아 찌거나 구운 후 으깨 추출한 수액을 발효하고 증류한 술이다. 이때 아가베는 5년 이상 자란 것을 수확한다. 우리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진귀한 이 술은 현재 미국에서 위스키, 보드카를 누르고 증류주 시장을 잠식하고 있다. 비단 미국만의 흐름이 아니다. “테킬라 소비액을 봤을 때,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연평균 성장률이 북미 18%, 유럽 14%, 아프리카 41%, 아시아 20%를 보이고 있어요. 5년 동안 두 자릿수의 성장을 보이는 주류 카테고리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워요.” 세계적인 주류 회사 디아지오의 간판 테킬라 ‘돈 훌리오’를 담당하는 유미화 매니저의 설명이다.
관세청 통계에 따르면 2020년과 지난해 국내 테킬라 수입액을 비교했을 때 1.6배가량 늘었다고 한다. 특히 지난해 수입량이 전년 대비 줄었음에도 수입액이 늘었다는 지표를 통해 프리미엄 테킬라가 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테킬라에 대한 인식이 바뀐 데는 미디어의 영향이 컸다. 2019년 개봉한 <기생충>에서 기정(박소담)이 박 사장네에서 패트론을 병나발 부는 장면, 2022년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 <서울체크인>에서 엄정화가 클라세 아줄을 마시는 장면이 등장하며 대중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했다. 특히 <기생충>에서는 식탁에 놓인 쟁쟁한 위스키를 제치고 패트론을 조명한 것, <서울체크인>에서는 장인이 손수 문양을 새긴 고급스러운 도자기에 담긴 것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일명 ‘엄정화 테킬라’로 클라세 아줄이 노출되며 대중의 관심이 시작됐다면, 본격적인 관심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작됐어요. 돈 훌리오 1942가 고감도 마케팅을 시행했으며, 클라세 아줄이 정식 출시된 효과였죠.” 데일리샷 김예연 콘텐츠팀 리드의 설명이다.
하지만 김 리드가 보기에 튀는 지표는 따로 있었다고 한다. “데일리샷의 검색량은 물론 판매량 면에서도 정량적 지표가 확인된 건 올 초였어요. 켄달 제너가 출시한 ‘818 데킬라’가 더현대 서울에서 팝업을 연 시점이었죠. 모 유명 브랜드의 레포사도 제품의 지난해 연간 판매량의 세 배가 넘는 판매량을 818 데킬라 레포사도가 한 달 만에 달성했어요.” 김 리드의 분석에 따르면, 테킬라 판매량을 봤을 때 818 데킬라의 인기는 일반 소비자에게 ‘테킬라’라는 주류 카테고리를 알리거나 재발견하는 효과로 이어졌다고 한다. 김 리드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더 들려줬다. 믹스토 테킬라로 테킬라에 입문한 적 없는 젊은 소비자들은 테킬라를 ‘고급스러운 패키지에 담긴 고가의 술’이라 인식한다고 한다.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얘기지만, 그 덕에 10만원이 넘는 고가의 테킬라가 싱글 몰트위스키처럼 팔리는 모양이다.
멕시코 음식을 향한 관심도 프리미엄 테킬라를 알리는 데 한몫했다. 그 선봉에는 에스콘디도, 엘몰리노, 라까예 등 다양한 멕시칸 퀴진을 선보이는 진우범 셰프가 있다. 진 셰프는 파인다이닝을 지향하는 에스콘디도의 좌석을 모두 카운터석으로 만들었다. 코스로 제공하는 음식과 페어링 주류를 주문했을 때 순차적으로 제공하는 테킬라를 세밀히 설명하고 소통하기 위해서다. “멕시칸 푸드와 테킬라는 각각의 프로덕트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라고 강조하는 진 셰프는 에스콘디도의 밀도 높은 서비스를 통해 멕시코 문화의 정수를 전하고자 한다. 하지만 페어링 주류로 40도가 넘는 테킬라가 괜찮을지 의구심이 든다. 진 셰프는 그 한계를 칵테일로 풀었다. 에스콘디도에는 바텐더가 상주한다. 파인다이닝에 소믈리에 대신 바텐더라니 흥미롭다. 한편 바 참 임 바텐더는 테킬라가 바텐더들이 선호하는 술이라고 귀띔한다. 테킬라 맛의 프로필이 칵테일에 매력적으로 쓰일 뿐 아니라 미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다는 점에서 바텐더를 매료하고 있다. “예전에는 손님들에게 테킬라로 만든 칵테일을 추천하면 기피하기도 했으나, 이제 자연스럽게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요.”
임 바텐더, 진 셰프, 유 매니저, 김 리드 모두 프리미엄 테킬라를 니트 잔에 따라 향과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마시길 권한다. “아가베는 보리나 옥수수, 밀처럼 흔한 작물이 아니에요. 7년가량 자란 식물에서 수액만 채취해 만든 테킬라는 원물이 주는 즐거움이 커요. 위스키처럼 오래 숙성할 이유가 없죠.” 진 셰프는 “지금이 테킬라가 가장 쌀 때”라고 강조한다. 테킬라의 가치가 재평가되며 국제 기준에 따라 가격이 오르고 있다는 말도 전한다. 지구 반대편에서 자란 신비로운 식물로 빚은 이 오묘한 술을 따라놓고 사모하고 열중할 때다. 지금이 가장 저렴하다니 특히.(V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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