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쁘띠 아쉬’ 공방과 류성희 감독이 연출한 ‘손’의 의미
쁘띠 아쉬와 류성희 미술감독이 연출한 ‘서울의 손’.
지속 가능성과 사회적 책임을 유쾌하게 풀어내는 실험적 공방, 쁘띠 아쉬(Petit H). 에르메스의 각종 메티에 제작에서 사용되지 않은 소재는 모두 쁘띠 아쉬로 모인다. 가죽, 실크, 패브릭, 크리스털, 부품 등은 버려지는 것 없이 이곳에서 재창조될 준비를 마친다. 장인과 아티스트들이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고 의외의 소재를 결합하면서 만들어낸 창의적인 오브제는 다시 우리 일상으로 찾아온다. 쁘띠 아쉬는 에르메스 가문 6대손 파스칼 뮈사르(Pascale Mussard)의 주도로 2010년 시작됐고, 현재 고드프루아 드 비리유(Godefroy de Virieu)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맡고 있다. 10월 23일, 쁘띠 아쉬와 류성희 미술감독의 연출 아래 에르메스 메종 도산이 ‘향수 어린 서울’로 변모한다. 할머니가 꿰맨 조각보, 어머니의 정성이 깃든 담금주처럼 우리 기억 속에 따뜻하게 자리 잡은 수공예에 대한 오마주다.
쁘띠 아쉬는 1년에 한두 번 해외에서 행사를 엽니다. 늘 로컬 아티스트에게 시노그래피 작업을 의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고드프루아 쁘띠 아쉬 프로젝트를 통해 누리는 즐거움 중 하나는 예술적 감수성과 재능을 지닌 이들을 만나 다양한 세계를 아우른다는 점이죠. 훌륭한 인재들과 교류하며 나눈 대화는 제게 값진 경험이자 쁘띠 아쉬의 강점 중 하나죠.
류성희 감독의 어떤 작품 세계에 매료됐나요?
고드프루아 우린 정형을 추구하진 않아요. 예컨대 시노그래피 작업이라고 해서 반드시 시노그래퍼와 손잡지 않습니다. 류성희 감독이 영화에서 구축해온 아름다움에 자연스럽게 빠져들었고, 쁘띠 아쉬 오브제를 그 세계에 스며들게 하고 싶었어요. 직접적인 연결성은 없지만 창작을 통해 이어지며 하나의 강력한 프로젝트로 거듭났죠.
류성희 감독은 쁘띠 아쉬의 어떤 지향점에 공감해 프로젝트에 참여했나요?
류성희 쁘띠 아쉬는 쓰이지 않은 것들을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오브제를 만들어내죠. 그런 실험적인 장인 정신이 인상적이었어요. 말하고 보니 ‘장인 정신’과 ‘실험적’이란 말은 서로 대치되는 개념인데, 쁘띠 아쉬는 이 둘을 아우르죠. 또 대학에서 도예를 전공한 저는 장인 정신을 경외해요. 물론 영화미술을 하면서 공간으로 확장되는 큰 작업을 많이 하지만, 작지만 깊이 다뤄지는 것들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 정수인 쁘띠 아쉬와 만나면서 예상을 넘어서는 뭔가를 수행할 것 같았어요.
이번 시노그래피는 ‘서울을 배경으로 한 영화 촬영장’이라고만 들었어요. 그 출발점이 궁금합니다.
류성희 서울 공간에 대한 3대에 걸친 기억이 펼쳐져요. 그 중심에 ‘손으로 하는 가사 노동’이 있죠.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할머니, 어머니는 늘 뭔가를 만들어내셨잖아요. 1층에는 부엌, 할머니 방, 세탁실이 자리하죠. 부엌에는 어머니가 만든 정갈한 음식과 정성스럽게 담근 술이 있고, 다른 방에는 할머니가 뜨개질한 조각보가 놓여 있죠. 세탁실에는 다림질, 빨래 등 손으로 하는 가사 노동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고요. 이제 손으로 하는 많은 일이 기계로 대체됐잖아요. 옷 관리기가 냄새를 제거하고, 다양한 주방 기구가 요리를 돕죠. 서울 곳곳에 깃든 수공예의 아름다움과 그 시간에 대한 경외가 이번 시노그래피의 출발점이에요.
시노그래피에서 어느 부분이 인상적이었나요?
고드프루아 한국인의 일상을 담은 장면, 특히 부엌 연출이 와닿았어요. 부엌에서 행해지는 일이 쁘띠 아쉬에서 매일 하는 작업과 닮았기 때문이죠. 부엌에서 여러 식재료로 요리를 하듯, 쁘띠 아쉬에서는 다양한 소재로 오브제를 제작합니다. 또 부엌은 집 안에서도 가장 화기애애하면서도 창의적인 공간이죠. 쁘띠 아쉬처럼요.
류성희 감독과 교류하면서 놀란 순간이 있다면요?
고드프루아 매 순간이 마법 같았죠. 화상회의를 수없이 하며 장면의 짜임을 구상하고 관객에게 어떻게 전할지 이야기 나눴어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티스트와 나누는 이런 대화는 언제나 즐거워요. 물론 가장 큰 기쁨은 프로젝트가 현실화되는 순간이죠. 지금 쁘띠 아쉬 팀은 매우 들떠 있어요. 상상이 구체화되면서 결과물이 나왔고, 이제 온전히 그 세계에 빠져들면 되니까요.
영화가 아니라, 관객이 그 안으로 들어가 움직이는 ‘행사’라는 매체를 위해 작업한다는 점에서 어떤 어려움과 즐거움이 있었나요?
류성희 영화의 최종 목표는 스크린으로 보는 그림의 완성도죠. 제 작업 위에 강렬한 조명과 카메라가 더해지며 결과물이 만들어지기에, 이런 영화적 기술을 숙지하며 일해왔어요. 이번 행사는 어떤 장치 없이 관객의 눈으로 직접 보고 평가하기에 두렵기도 했어요. ‘관객이 내 작업물을 한참 쳐다보면 어쩌지? 허점이 드러날 텐데’ 하면서 계속 보강했죠.(웃음) 물론 즐거운 점도 있고요. 관객이 공간에 들어와 사진을 찍고 이야기를 나누는 등 작품과 직접 소통한다는 점에서 기대가 커요. 영화에선 배우를 염두에 두고 배경을 만든다면, 이곳은 방문하는 모든 분이 주인공이 된다는 점도 재미있죠.
이번 행사를 통해 관객이 뭘 얻길 바라나요?
고드프루아 쁘띠 아쉬는 장인과 아티스트들이 재료에 새 생명을 불어넣으며 오브제를 창조해내죠. 이런 우리의 존재 방식, 예상치 못한 유쾌함, 창조의 역발상을 행사에서도 나누고 싶어요. 특히 이번엔 우리 오브제가 영화 주인공이 된 것 같아 흥미로워요.
류성희 감독님은 쁘띠 아쉬 공방을 방문했는데요, 가장 놀라운 점이 뭐였나요?
류성희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마무리하는 시점이라 많이 피곤한 상태였는데, 쁘띠 아쉬에서 공방을 꼭 보길 원하더라고요. 처음엔 에르메스 매장 투어 정도로 생각하고 굳이 가야 하나 고민했어요. 하지만 그곳에서 장인 정신을 존중하는 마음을 여실히 느꼈고 영감을 받았어요. 그들은 정말 진심이에요. 기존에 염두에 둔 프로젝트의 주제가 사라지고, 일상을 손으로 빚어내던 시절이 떠올랐죠. 할머니의 뜨개질, 어머니가 담근 매실주 등 예술의 경지에 오른 가사 노동에 대한 향수가 짙어졌어요. 손에서 탄생한 모든 아름다운 결과물을 잊지 말자는 메시지를 담고 싶었습니다. 이번 작업은 시나리오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수공예와 관련한 기억을 복원하는 것, 이것이 제가 만든 시나리오입니다.
쁘띠 아쉬는 작은 실험실 같아요. 에르메스에서 한 번도 활용된 적 없는 기법에 도전했다고요. 예를 든다면요?
고드프루아 쁘띠 아쉬는 에르메스가 아직 다루지 않은 새로운 재료를 발굴하고, 낯선 결합을 시도하죠. 라벨(Ravel) 도예 공방을 통해 흙과 가죽을 결합한 오브제를 제작한 적 있어요. 물성이 다른 두 재료가 만나니 수많은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었죠. 쁘띠 아쉬는 실험실이자 만남의 장소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 재료와 재료의 만남, 그리고 다양한 노하우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무한한 창작을 향해 나아가죠. 방한 중에 알게 된 여러 한국 장인의 기법도 마찬가지예요. 스튜디오 부분(Studio Booboon)과 함께 작업한 선반에 한국의 조각보 기법으로 수를 놓았죠.
쁘띠 아쉬는 2010년에 설립되었으니, 벌써 15주년을 맞이했군요. 가장 큰 성과는 뭘까요?
고드프루아 쁘띠 아쉬는 매우 혁신적인 프로젝트면서 에르메스가 창립 당시부터 지향해온 방향성을 유지하죠. 재료를 귀히 여기고, 장인의 가치를 알며, 사물의 기원을 존중하고, 함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 파스칼 뮈사르가 쁘띠 아쉬 공방을 세우면서 쓰이지 않은 소재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고, 많은 만남과 교류를 통해 점점 더 풍요로워지고 있죠. 쁘띠 아쉬는 에르메스 역사의 한 부분으로 공고히 자리 잡았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거예요. 사실 쁘띠 아쉬의 가장 큰 힘은 존재 그 자체입니다. 이런 공간이 실제로 있고, 그곳에서 프로젝트가 실현되고 있다는 점이 바로 쁘띠 아쉬라는 위대한 브랜드가 지닌 본질적인 힘이죠. V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