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 다카하시가 말하는 ‘언더커버’의 세계
준 다카하시가 들려주는 언더커버의 기묘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내가 가장 처음 구매한 언더커버(Undercover) 제품은 토끼가 그려진 작은 파우치다.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도쿄의 어느 매장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구하기 어렵다는 친구 말에 서둘러 골랐던 것만은 기억한다. 하지만 이제 시간에 쫓기며 쇼핑할 일은 없다. 서울에도 언더커버 매장이 존재하니까. “안녕하세요?”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이른 아침, 더현대 서울 2층에 자리한 언더커버의 새 보금자리 앞에서 만난 준 다카하시(Jun Takahashi)는 한국어로 인사를 했다. 소소하지만 기분 좋은 매너다. 바로 전날 서울에 왔고, 아침 8시부터 매장에 있었지만 피곤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솔직히 표정 변화가 거의 없는 편에 가깝다). 그는 최근 도쿄가 심하게 더워 습한 서울 아침이 쾌적하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다카하시와 대화를 나누며 인상 깊었던 건 그가 지극히 ‘보통’ 사람이라는 점이었다. 어느 정도 괴짜 같은 면을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럴 만한 것이 언더커버는 펑크로 시작해 다양한 서브컬처를 다루며 인기를 얻은 브랜드가 아닌가. 그가 전개하는 컬렉션은 매 시즌 다른 사람이 작업한 것처럼 보일 정도로 다채롭고, 런웨이에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진다. “모든 과정에 특별한 규칙은 없습니다. 늘 직감을 따르죠. 그 순간 새롭게 느껴지는 것, 지금까지 해보지 않은 것, 다시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이요.” 하지만 인생 첫 쇼핑에 대한 답은 꽤 만족스러웠다. “초등학생 때 스스로 고른 은색 블루종 재킷.” 역시 평범하진 않다.
준 다카하시가 패션계에서 가장 독창적인 디자이너라는 건 분명하다. 동시에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볼 줄 아는 진중하고 겸손한 인물이다. 창립 35주년을 맞아 20년 전 아카이브를 되살린 2025 가을/겨울 컬렉션 ‘But Beautiful 4’가 이를 증명한다. “언더커버 최고의 컬렉션이었던 2004 가을/겨울 ‘But Beautiful’을 재해석하며 나와 브랜드 모두 어떻게 변화하고 성장했는지 확인하고자 했습니다.” 해당 컬렉션을 최고로 꼽은 이유를 묻자 그가 살짝 머뭇거렸다. “간단히 말하면, 나만 만들 수 있는 작품이 많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장 강렬했던 컬렉션이기도 하죠. 훌륭한 쇼피스와 실용적인 옷의 균형도 잘 맞았어요. 이번에도 그 균형을 최대한 이끌어내고 싶었습니다.” 프랑스 예술가 안 발레리 뒤퐁(Anne-Valérie Dupond)의 봉제 인형 조각에서 영감을 얻은 단추 장식처럼, 최신 컬렉션에는 20년 전 아이디어가 많이 남아 있다. 그녀는 이번 컬렉션 신발과 가방 제작에도 참여했다. “당시 1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모델을 기용했어요. 여러 세대의 사람들이 입었을 때 드러나는 서로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같은 이유로 이번에도 그 컨셉을 유지했습니다.” 신선함은 챔피온(Champion)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스웨트 수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좋아하는 브랜드인 데다, 컨셉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보여주기 위한 선택이었습니다. 컬렉션 주제가 옷을 만들어본 적 없는 사람처럼 서툴게 디자인하는 것이었어요. 약간 비대칭이거나 수선 자국 같은 디테일이 들어갔죠. 이것을 강조하려면 누구나 아는 기본 아이템을 변형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랍니다.”
“최적의 장소입니다.” 서울에서 선보이는 언더커버는 플래그십 스토어 대신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방식을 택했다. 다카하시는 백화점에서는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모든 세대를 만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서울은 비즈니스 기회가 많은 도시입니다. 때마침 무신사와 더현대에서 파트너십 제안이 왔고, 한국 시장으로 확장하는 좋은 시작이 될 거라 확신했어요. 이번 서울 매장을 통해 완전하고 다양한 언더커버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한국 고객을 위한 익스클루시브 디자인도 계속 개발할 예정이고요.” 언더커버는 서울 매장 오픈 기념 아이템도 출시했다. 대표 캐릭터인 테디 베어에 한국을 상징하는 호랑이 그래픽을 접목한 티셔츠와 볼캡이다. 검정과 흰색 두 가지로 구성되었고, 이곳에서 한정 판매한다.
76㎡ 규모에 검정 일색인 매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프랑스 작가 윌리엄 기용(William Guillon)의 ‘LV-426’ 샹들리에. 상상 속 외계 생명체를 형상화해 영화 <에이리언> 시리즈에 등장하는 행성의 이름을 딴 이 청동 조명은 그의 작업실에도 있다. 다카하시는 그 아래 서서 <보그> 촬영을 진행했다. 돌돌 말아 올린 티셔츠 소매 끝으로 양팔에 있는 타투가 조금씩 드러났고, 밑단을 접은 바지 아래로는 닥터마틴과 협업한 체크무늬 밤색 로퍼를 신고 있었다. 유일한 액세서리인 이블아이 펜던트 목걸이와 밀짚모자 역시 각각 미국 주얼리 브랜드 시 리얼 플라워(See Real Flowers), 모자 브랜드 키지마 타카유키(Kijima Takayuki)와 함께한 언더커버 제품이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는 둥근 뿔테 안경을 주기적으로 썼다 벗었고,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선글라스를 쓰기도 했다.
다카하시의 영역은 패션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음악에는 특히 진심이다.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여러 음악을 듣지만, 최근에는 1970~1980년대 일본 록 음악을 탐색 중이다. 매장 오픈 당일 밤, 한남동 바 로쏘(Rosso)에서 열린 파티에서는 직접 디제잉까지 했다. “지금은 밴드 활동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새 그룹(그는 과거에도 섹스 피스톨즈를 오마주한 밴드 활동을 했다)의 모든 멤버는 50대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실험적인’ 밴드죠.” 다음 달에 라이브 공연을 선보일 계획이었지만, 그림 작업을 위해 내년으로 연기했다. 11월에 개인 전시를 열기 때문이다. 다카하시는 주로 유화 작업을 하는데, 눈이 없는 초상화 시리즈가 유명하다. “약 10년 전, 초상화를 그리다 눈을 잘못 그려서 물감으로 덮어버렸는데, 그게 오히려 작품과 어울린다고 느꼈습니다. 그렇게 눈 없는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죠.” 요즘에는 다시 눈을 그리기도 한다. 그가 휴대폰을 꺼내 새로운 작품을 보여주었다. 언더커버 2014 가을/겨울 컬렉션 ‘Cold Blood’를 모티브로 한 160cm 크기의 커다란 그림이다. “페인팅은 정말 자유로운 작업이에요.” 주 2회 러닝도 빼먹지 않는 ‘취미 부자’는 최근 영국 도예가 스티브 해리슨(Steve Harrison)의 작품을 모으는 데 몰두하고 있다. “한국에서 판매하는 곳도 검색해 왔어요. 두 군데가 있던데, 방문할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9월 말부터 열리는 2026 봄/여름 파리 패션 위크 캘린더에 언더커버의 이름은 없다. “이번 시즌에는 런웨이 쇼를 선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영상을 제작하고 있어요. 바로 다음 주에 촬영할 예정이라 요즘 아주 분주하죠.” 다카하시는 패션쇼를 준비하는 것보다 훨씬 고된 과정이라고 털어놨다. 하지만 분명 재미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살짝 힌트를 주자면 ‘이상한 이야기(Strange Story)’가 될 겁니다. 단순히 우리 옷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스토리텔링이죠. 실제 배우가 등장할 거예요.” 오전 10시 25분, 오픈이 임박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마네킹이 입은 옷을 매만지고, 매장 디스플레이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다. 2시간 30분 전에도 했던 일이다. “이 안에는 뭐가 들어 있나요?” 매장 인테리어에 맞춰 흑백으로 준비된 케이터링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말린 대추를 올린 검정 퍼프 안의 담백한 누룽지 크림까지 모두 맛본 다카하시는 이제 손님을 맞을 준비를 끝낸 것처럼 보였다. 자, 지금부터는 쇼핑 시간이다. VK
WELCOME TO SEOUL
지금 서울은 전 세계 패션 브랜드가 향하는 궁극의 목적지다. 스스로를 시험하고 증명하기 위해 도쿄, 런던, 밀라노에서 건너온 글로벌 브랜드 3개를 <보그 코리아>가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