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봄/여름 파리 패션 위크 DAY 3
“예전에는 패션을 좋아하는 게 가장 멋진 일이었지만 이제는 패션을 무너뜨리는 게 더 멋진 일이 됐어요.” 디올 우먼 쇼 무대에 첫발을 디딘 조나단 앤더슨도 패션계의 혼란기를 겪었습니다. 톰 포드의 하이더 아커만과 세실리에 반센도 마찬가지였죠. 세 사람은 세상의 질문에 신선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압박감을 이겨내고, 오히려 자신만의 질문을 더 깊이 밀어붙였습니다. 런웨이는 정답을 내놓기보다는 더 날카로운 질문을 남기는 자리니까요. 조나단 앤더슨은 존중과 파괴 사이에서 디올의 아카이브를 흔들었고, 하이더 아커만은 자정의 바다로 몸을 던지듯 위험과 쾌락을 동시에 껴안으며 톰 포드의 관능미를 심화했습니다. 세실리에 반센은 방향을 잃고 흔들리던 시기를 마무리하고, 다시 브랜드의 정체성과 기본기를 다졌죠. 언젠가 반드시 들이닥칠 질문에 성심껏 응답한 세 브랜드의 무대를 살펴보시죠.
디올(@dior)
조나단 앤더슨의 디올 여성복 데뷔 쇼는 기대를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두 달이라는 짧은 준비 기간에도 높은 완성도에 화제성과 대중성, 실험적인 시도까지 균형 있게 담아냈죠. “브랜드를 사랑할수록 더 많은 것을 돌려받는다”는 존 갈리아노의 조언을 되새기며, 압박감을 이겨낸 걸까요. 존중과 파괴, 경외와 유희라는 상반된 감정을 동시에 껴안았죠. 조나단은 이 모든 심정을 쇼 오프닝 영상에 담아냈습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영화 <싸이코>와 디올을 거쳐 간 디자이너들의 흔적이 빠르게 교차했습니다. 존 갈리아노, 라프 시몬스, 마리아 그라치아 키우리까지 모든 전통과 기억을 소환한 뒤, 신발 박스에 고이 넣어두었죠.
곳곳에 디올의 상징이 가득했습니다. 첫 룩으로 등장한 흰색 플리세 램프셰이드 드레스는 디올의 뉴 룩을 환기하며 흔한 A 라인, H 라인의 반복을 피했습니다. 이어 등장한 바 재킷은 남성복에서 먼저 시도했던 테일러링을 인형 옷처럼 축소한 버전이었죠. 모자는 갈리아노식 드라마를 빌려오며 패션 팬들에게 반가운 울림을 남겼습니다. 키우리의 실용 중심 시대와 결별을 선언하는 장면이었고요. 물론 대중성을 겨냥한 아이템도 있었습니다. 특히 남녀 모두 입을 수 있는 셔츠, 데님 팬츠, 니트 케이프, 카고 쇼츠가 눈에 띄었죠.
액세서리에서 앤더슨의 장난기 어린 재치가 빛났습니다. 레이디 디올을 스웨이드 볼링백으로 낮추고, 로저 비비에 루이 힐에 토끼 귀 디테일을 얹는 순간, 디올의 고전적 판타지가 동심 어린 위트로 흔들렸습니다. 시갈 백, 꽃 장식 뮬, 로퍼는 확실히 시장을 겨냥한 제스처였습니다. 조나단 앤더슨은 자신의 개성과 디올의 정체성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까요? 중요한 건 이제 시작이라는 겁니다.
톰 포드(@tomford)
“나는 네가 헤엄칠 수 있으면 좋겠어 / 돌고래처럼, 그래, 돌고래처럼 자유롭게.” 물속의 먹먹한 윙윙거림이 데이비드 보위의 ‘Heroes’로 바뀔 때까지, 모델들은 아주 느릿한 파도처럼 무대를 향해 밀려들었습니다.
하이더 아커만은 ‘자정의 바다 수영’이라는 테마로 톰 포드를 풀어냈습니다. 깜깜한 바닷빛이 감도는 가운데 위험과 매혹의 공기를 채웠죠. 수영복은 없었지만, 트라이앵글 브라 톱과 시어 쇼츠, 그 아래로 드러난 조크스트랩이 긴장감을 더했습니다. 철사 구조 드레스와 비대칭 스트랩 드레스는 중력을 거스르는 듯한 과감함으로 무대를 흔들었고, 몇몇 룩은 루디 건릭의 모노키니를 소환하며 섹슈얼의 계보를 명확히 이어갔습니다.
톰 포드의 세계로 먼저 넘어간 모델들이 관객을 이끈 점도 한몫합니다. 무표정을 거두고 관객과 옆 모델에게 곁눈질하며 유혹했죠. 노출만으로 채우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은근한 시선과 호흡, 타이밍이 관능미를 심화했죠. 톰 포드가 남긴 영화적 감각을 계승하면서도, 하이더 아커만 특유의 아찔함을 더한 무대였습니다.
세실리에 반센(@ceciliebahnsen)
세실리에 반센의 이번 시즌은 이름 그대로 ‘Heartfelt(진심 어린)’ 무대였습니다. LED 하트가 박동하듯 빛나는 드레스, 바람처럼 부풀었다 가라앉는 드레스는 여전히 특유의 낭만을 간직했습니다. 핫 핑크와 선명한 레드가 더해져 컬러 스펙트럼도 넓어졌죠. 하지만 달콤함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나일론 스트랩, 카라비너, 방수 립스톱 소재, 해체된 마운틴 재킷이 페미닌한 스커트와 엮이며 낭만을 단단하게 붙잡았습니다. 풍성한 주름 속에 숨은 포켓은 실용성과 의외성을 동시에 담았죠.
지난 시즌이 10년 역사의 정점 같았다면, 이번 컬렉션은 반복과 현상 유지 국면에 가까웠습니다. 정체성은 여전히 굳건했지만, 발전 속도는 다소 느려 보였고요. “지난 몇 달간 우리는 정말 많이 반성하고 회고했으며, 그 과정에서 ‘이제 뭘 해야 하나’라는 부담도 분명히 느꼈어요.” 쇼가 끝난 후 그녀가 털어놓은 고백처럼, 이번 무대는 망설임 끝에 내놓은 결과였죠. 기술적인 장치를 더하며 낭만을 현실로 구현한 건 분명합니다. 세실리에 반센의 팬이라면 옷장에 하나 더 들이고 싶을 만한 실루엣이 분명 있었죠. 이런 낭만은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적어도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세실리에의 행보에는 박수갈채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