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셰프들의 음식, 잘 먹었습니다! 다음은?
스타 셰프들이 발굴되고, 그들의 미식 세계를 열광적으로 수용한다. 기묘할 만큼 급진적으로 움직이는 우리의 취향에서 이 식탁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대만 타이베이 시내를 걷던 중 중식 셰프 정지선의 입간판을 보았다. 현지에 사는 지인이 <흑백요리사: 요리 계급 전쟁(흑백요리사)>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특히 중식 셰프들이 선전이라고 했다. 숙소에 들어와 넷플릭스에 접속하니 <흑백요리사> 시즌 2가 인기 콘텐츠 1위에 올라 있다. 나머지는 대만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귀국해 인스타그램에 접속하니 손종원 셰프가 남성지의 디지털 커버로 등장했다. 미쉐린 1스타의 이타닉 가든과 라망시크레의 총괄 셰프인 그는 <흑백요리사> 시즌 2에 백수저로 출연했다. 알고리즘은 그의 경력과 학력을 알려주고, 유명 인사와 찍은 과거 사진으로 이어졌다. 업계는 정말이지 발 빨라서 조니워커 행사장을 찾은 그가 배우 조인성과 포토월에 서고, 편의점은 그의 이름을 딴 도시락을 출시했다. 데자뷔인가. <흑백요리사> 심사위원이자 모수의 오너 셰프인 안성재의 지난해를 보는 것 같다.
2024년 여름, 돔 페리뇽의 새로운 빈티지를 발표하는 자리에 참석하러 안성재 셰프와 바르셀로나에 갔다. 그때 안 셰프가 “추석 연휴에 프로그램이 하나 나올 것 같다”고 귀띔했다. 당시 그는 동행한 우리를 위해 예약이 어렵다는 레스토랑과 바를 손수 섭외해 초대했다. ‘아시아 50 베스트 바’에서 1위를 한 바든 동네의 작은 노포든 그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한 잔의 술과 접시마다 존중을 보이며 즐겼다. 미쉐린 3스타 셰프 앞에서 ‘먹지식’을 자랑하는 이들의 말도 경청하는 그를 보며 팬이 되었다. 이런 사람이 진심을 다하는 요리라면 가격이 부담되더라도 마리아주까지 풀코스로 먹고 싶어졌다. 하지만 당시 모수는 두 번째 오픈을 위해 매장을 재정비하던 시기였다. 그가 업장 인테리어 하나하나를 치밀하게 신경 쓰던 모습도 기억난다. 모수의 소믈리에가 경험하면 좋을 것 같다면서 고가의 와인을 진지하게 고르기도 했다. 파인다이닝은 접시 위의 음식뿐만이 아님을 그에게서 보았다.
동행한 모두가 안 셰프의 팬이 됐기에, 바쁜 그를 부여잡고 종로에서 뒤풀이를 가졌다. 하지만 <흑백요리사>가 방영된 뒤 단톡방은 눈치만 보다 잠들었다. 미식 업계에서는 이미 유명한 인물이지만 전국구 스타가 됐기 때문이다. 그의 인간적인 매력은 역시 모두에게 가닿았다. 물론 모수 예약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됐다.
<흑백요리사> 시즌 1에서 안성재 셰프를 위시해 흑수저 셰프들(나폴리 맛피아, 요리하는 돌아이)도 주목받으면서 역시 이들 업장도 예약이 힘들어졌다. 프로그램 방영 전에 그들의 화보와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때가 마지막 기회였던 것 같다. 나폴리 맛피아의 머리에 크루아상을 올리면서 파스타 면으로 바꿀지 고민할 때만 해도 이렇게 반향이 클 줄 몰랐으니.
시즌 2는 조금 다르게 백수저들이 더 이슈다. 앞서 말한 손종원 셰프를 비롯해 57년 경력 중식 셰프 후덕죽, <한식대첩 3> 우승자 임성근 등이 여기저기 불려 다닌다. 내가 안성재 셰프의 성정에 먼저 끌렸듯 OTT로는 맛을 보지 못하는 시청자에게는 화려한 요리 기술과 더불어 그들의 태도와 언변이 먼저 다가올 수밖에 없다. 결국엔 모든 것이 매력 싸움 아니겠는가. 그 매력이 무엇인가 하면, 손종원 셰프의 우아한 태, 임성근 셰프의 오만가지 소스에서 비롯되는 오만가지 유머 등 세부 사항을 열거할 수 있으나, 공통으로 ‘어른의 품격’이 보인다. 57년 경력의 셰프는 자신의 중식도를 후배에게 내주며(셰프가 자기 칼을 건넨다는 건 내 주식 계정을 ‘수포자’인 조카에게 맡기는 것보다 더 어렵다) 묵묵히 지켜본다. 그들은 하나같이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후배를 존중하며, 자기 분야는 여전히 배우고 싶은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멋진 원로 예술가를 만날 때와 비슷하다. 그들의 눈은 나비를 처음 본 어린아이처럼 반짝인다. 한참 어린 내게도 궁금한 것이 있다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질문한다. 그런 태도가 그들을 대가로 만들었을까, 아니면 적당한 성공이 아니라 대가이기에 그런 태도가 나올까. 이런저런 사유를 끌어내는 프로그램이니 인기 있을 만하다.
어른의 품격으로 만든 그들의 음식에 내가 만족할지는 모르겠다. 모두가 줄을 선다는 식당, 특히 파인다이닝을 경험할 때면 조금 피로했다. 나는 ‘미각’이라는 재능이 없고 그저 ‘쩝쩝박사’라는 결론에 도달할 뿐이다. ‘이것도 다 경험’이라는 마음으로 기회가 있을 때면 적극적으로 파인다이닝 테이블에 앉지만, 나의 세련되지 않은 취향을 확인하며 작아지기도 했다.
샌프란시스코의 3스타 레스토랑인 베누를 방문했을 때다. 함께 일할 기회를 달라고 전 세계에서 지원서가 쏟아지는 베누의 오너 셰프 코리 리(Corey Lee)는 자신의 레스토랑을 파인다이닝으로 분류하길 꺼리지만 말이다. 파인다인닝이란 뭘까. 분자 요리의 조상 격인 엘 불리를 운영했던 페란 아드리아(Ferran Adrià)가 지난해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용어의 혼재’를 지적했다. “미식 산업에는 세계적으로 합의된 언어가 없어요. 같은 단어를 써도 각자 다르게 이해하죠. 그래서 정의가 필요합니다”라며 오뜨 퀴진과 파인다이닝은 비슷한 개념이 아니라 문화적 맥락에서 완전히 다른 의미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어쨌든 베누의 창의적인 메뉴와 서사가 담긴 코스 구성, 섬세한 호스피탈리티는 내게 파인다이닝이었다.
평일 저녁 방문한 나와 일행은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새로운 메뉴가 등장하면 말을 멈추고 음식을 눈과 혀로 관찰했다. ‘왜 이 음식이 나왔을까, 그는 왜 이렇게 조리했을까.’ 동행한 음식 전문 기자의 진지한 태도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샌프란시스코까지 와서 예약하기 힘든 자리에 앉아 있다는 부담감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색동을 입은 홍합 애피타이저는 그의 뿌리인 한국에서 영향을 받았을 거라는 추론 정도는 했지만 맛에 대해 나는 거의 담백하다, 밍밍하다, 아니면 술자리가 길어져서 너무 구워진, 그래서 바삭하니 맛있는 삼겹살 같군 정도로 단편적인 감상만 떠올랐다. 주방에서 인사를 나눈 코리 리는 “베누에서 제공하는 메뉴는 저의 모든 경력, 셰프로서 지닌 철학, 인간으로서의 경험을 반영한다”고 말했기에 이런 내 수준이 좀 미안해졌다. 옆자리의 음식 전문 기자는 매우 흡족해 보였다. 마리아주로 나오는 사케마다 촬영했으니 집에 가서 왜 이 술이 나왔는지 연구했을지 모른다. 그러고 보면 모수를 방문했을 때도(그녀는 여정이라 표현했다) 이런 감상을 남겼다. “순간의 기억을 영원으로 데려간다.” 같은 경험을 하고도 이렇게 즐기는 자와 그렇지 못한 나. 뮤지컬을 봤을 때 “오늘도 진한 사랑을 했다”며 울던 관객과 졸다가 나온 내가 떠올랐다. 같은 시간을 들였으니, 뭔가 억울했다.
비엔나에 있는 미쉐린 3스타 레스토랑이자 ‘월드 50 베스트 레스토랑’의 단골인 슈타이어렉에 들렀을 때는 더했다. 눈 오는 겨울, 공원을 헤매다 도착한 레스토랑. 감기로 훌쩍이는 코와 추위 때문에 껴입은 롱 패딩에 반하는 우아한 조명과 잔머리 없이 틀어 올린 헤어의 손님 때문에 나는 움츠러들었다. 자리에 앉으니 빵 30여 개를 담은 손수레가 등장했다. 노년의 웨이터는 빵 설명에만 5분을 할애했는데 내향인인 나로서는 시선을 포카치아에 둘지 그를 볼지 얼마큼 고개를 끄덕일지 패딩을 벗었어도 등이 뜨끈해졌다. 나오는 메뉴마다 긴 설명이 이어졌다.
페스코테리언이라 채식 옵션을 선택했는데 네다섯 번 연속으로 나오는 흰 살 생선은 이제 그만을 외치고 싶었다. 오스트리아의 식재료를 전통 방식과 실험적인 시도로 완성한 메뉴에 조응하지 못하는 내가 죄스러웠다. 혹시 원래는 대단한데, 내가 고기를 못 먹어서 흰 살 사태를 일으켰나 싶었다. 이전에 어느 셰프의 토로가 기억난다. “식단을 제한하는 손님을 위해 요리하기는 너무 어려워요. 화가에게 자신의 삶과 견해를 반영하는 그림을 그려달라고 요청하면서 빨간색과 파란색은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과 같죠.” 음식은 갈수록 거의 그대로 남는 지경에 이르렀다. 채식 옵션보다 감기와 롱 패딩 때문일까, 내향인에게 너무 살가운 호스피탈리티는 역효과였을까, 아니면 소박한 내 유년 시절의 아비투스인가. 파인다이닝보다 집에서 잠옷을 입고 먹는 김치볶음밥이 편한 내 관성 말이다.
우리가 파인다이닝이라 명한 테이블을 즐긴 지는 오래지 않다. 1990년대 후반부터 호텔에서 프렌치 중심의 고급 레스토랑이 들어섰고, 2010년 전후로 여러 셰프가 자신의 이름을 건 레스토랑을 시작했다. 2016년 <미쉐린 가이드 서울>이 발간되면서 파인다이닝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아직은 파인다이닝이 아비투스인 대중이 많지 않다는 의미인데, <흑백요리사> 열풍에서 보듯 새로운 문화를 빠르게 선점하고 소비하고 향유하고 싶어 하는 우리로 인해 이 산업은 성장하고 있다. 어느 분야든 조속히 자리 잡기 위해서는 대중 스타가 나와야 하는데, 그 역시 흐름을 탔다. 물론 여전히 업장 대부분은 고가의 식사에도 스폰서 없이는 재정난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구조지만 말이다.
나와 비슷한 아비투스 동지들이 파인다이닝을 진심으로 즐기는지 의심스럽기도 했다. 친구는 진짜 맛있는 건 미쉐린 1스타라고 주장했다. “2스타부터는 셰프의 창작이 꽤 들어가야 하거든. 그래서 평균치의 입맛인 내게는 뭔가 낯설고, 그렇기에 맛있다고 느끼지 못하더라고.” 내겐 ‘아트’도 그랬다. 인상파 이후의 작품은 이해하기 어려웠던 나는 미술계를 ‘썰 대결’이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누가 더 멋진 말로 작품을 설명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후 여러 전시와 전문가, 작가를 접하면서 그런 과거가 몹시 부끄러워졌다. 물론 좋은 작품과 좋지 않은 작품이 있고, 한 대가가 자신의 회화를 보고 “이건 집도 아닌데 이 가격이 말이 되냐. 집은 머물기라도 하지”라고 말하는 영상에는 공감하지만, 예술에는 내가 미처 몰랐던 멋진 세계가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마크 로스코의 ‘빨간 그림’ 앞에서 통곡한 뒤였을까. 미술이라곤 뭉크의 ‘절규’를 교과서로만 봤던 나의 아비투스지만 마음을 열자 예술이라는 세계로 빨려가는 중이다. 그 안에서 호불호는 있지만 끝도 없이 이어지는 그 세계를 기웃거리는 것이 이젠 꽤 즐겁다.
파인다이닝도 맛과 경험을 떠나, 그들의 ‘창작 세계’로 접근하면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을까 싶었다. 한 줄에 1만8,000원짜리 미쉐린 김밥 앞에서 김밥천국을 떠올리며 그 시간을 아쉽게 보내지 않으려면 말이다. 그러고 보니 미술가와 셰프는 닮았다. 후에 서면 인터뷰에서 코리 리는 이런 답변을 했다. “인정받는 셰프가 된 후나 전이나 압박과 고독을 느꼈어요. 요리처럼 창의성을 요구하는 분야라면 어느 정도 필요하고 결부된 감정이죠. 혼자 감당해야 하고, 잘해내고 있는지 실질적인 척도 또한 없으므로, 끝이 없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안성재 셰프가 <흑백요리사>에서 심사할 때면 ‘의도’를 강조한다. 왜 이 재료를 쓰고 이런 플레이팅을 하는지, 어떤 맛을 지향했는지, 그 의도가 구현되고 먹는 이에게 전달돼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품도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화려하게 잘 그리는 기술만으로 예술이 되지 않는다. 바나나를 스카치테이프로 벽에 붙인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의도, 우린 그것에 매료된다. 그러고 보니 패션 에디터 선배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시안을 잡을 때 이유 없는 컷은 만들지 않아. 왜 이 옷을 입어야 하고 이 포즈를 취하는지 에디터가 의도를 명확히 가져야 해.” 선배는 상업사진을 연출하지만 그 안에서 예술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셰프들의 아비투스도 나와 다르지 않다. 안성재 셰프는 죽기 전에 먹고 싶은 음식을 할머니의 아무 음식으로 꼽았고, 코리 리 셰프는 외할머니가 쑨 도토리묵에서 영감을 얻어 초기 베뉴의 대표 메뉴를 만들었다. 그들은 추억을 뱃심으로 삼아 고독한 주방에서 의도를 찾고, 창작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수만 번의 칼질과 수면 부족으로 하루를 메우며 말이다. 그것이 접시 액자에 담겨 걸렸으니, 나의 취향 타령을 하기 전에 우선 이들이 주방에서 보낸 기약 없는 고독과 창작 과정을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집 냉장고에는 엄마가 보내준 김장김치도 가득하니 어려운 일도 아니다. VK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