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종의 야자수가 경고한다

열국의 낭만을 상징하던 야자수는 162종이 멸종 위기다. 기후 위기로 폭염과 폭우가 폭주하고 있다. 나는 일상의 퇴근길, 홍수로 맨홀에 빠진 여성과 위험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던 학생을 기억한다. 지난해 7월 12일 저녁, 지하철 7호선 철산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하루 종일 비가 세차게 온 날이었다. 차창 밖을 보니 타이어 절반 정도가 물에 잠긴 차량이 […]

열국의 낭만을 상징하던 야자수는 162종이 멸종 위기다. 기후 위기로 폭염과 폭우가 폭주하고 있다. 나는 일상의 퇴근길, 홍수로 맨홀에 빠진 여성과 위험을 알리기 위해 자리를 뜨지 않던 학생을 기억한다.

지난해 7월 12일 저녁, 지하철 7호선 철산역에서 내려 집으로 가는 마을버스를 탔다. 하루 종일 비가 세차게 온 날이었다. 차창 밖을 보니 타이어 절반 정도가 물에 잠긴 차량이 느리게 주행 중이었다. 세 정거장쯤 갔을까, 버스에 흙탕물이 스멀스멀 들어왔다. 이때만 해도 기사나 승객들은 천천히 혹은 아예 더 빨리 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얼마 못 가 물이 정강이까지 찼고 운전기사가 당황하며 소리쳤다. “모두 당장 내리세요!” 앞문을 열자 물이 더 세차게 밀고 들어왔다. 나는 아끼는 마르니 원피스를 입고 왔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원피스 끝자락을 손에 감아올리고 앞문으로 갔다. 흙탕물에 잠겨 내려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도로 한가운데 내리자 물이 엉덩이까지 찼다. 집까지 남은 거리가 멀지 않으니 조심히 걸으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가는 길의 지대가 낮아져서 물이 허리까지 올라왔다. 자동차를 버린 사람들이 언덕에 자리한 병원으로 향했다. 나도 따라갔다. 우산은 버리고 가방을 양손에 쥐고 머리에 이었다. 원피스 따위로 짜증 낼 때가 아님을 그제야 자각했다. 비가 계속 왔다. 너무 피곤했다. 퇴근 욕구가 두려움을 이겨, 사람들이 조심스럽게 줄지어 가고 있는 인도로 내려갔다. 수위는 허리와 가슴을 오갔다. 그 순간 비명이 들려왔다. 처음엔 어둡고 빗줄기가 거세 잘 보이지 않았다. 가까워지니 한 여성이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과 중년의 남성이 그녀를 끌어 올리려고 애썼다. 물살 때문에 그녀는 쉽게 나오지 못했다. 나까지 합류한 뒤에야 여성의 상체가 맨홀 밖으로 꺼내졌다. 여성은 울면서 제발 집에 데려다달라고 했다. 남성은 그녀를 일으켜 세워 팔짱을 끼고 함께 걸어갔다. 나는 무서워져 그저 빨리 빠져나가고 싶었다. 맨홀을 피하기 위해 도로 쪽으로 나갔다. 그때 여학생이 가방에서 스카프 같은 천을 꺼내 맨홀에 던지며 계속 소리쳤다. 천이 소용돌이에 휘말리며 돌았다. “여기 오지 마세요!” 내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여학생은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경고했다. 이 위대한 친구를 잊지 못할 테지만, 가을이 오고 이날의 기억은 짧은 악몽처럼 남았다.

올여름도 폭우로 안타까운 소식이 이어진다. 5년 공들인 인삼 농사를 망치고, 생업인 배달 일을 하다 급류에 휘말려 사망한 이도 있다. 요 몇 년 끔찍한 폭우와 폭염이 주기적으로 찾아왔다. 기상예보관 비온뒤(필명)는 근무해오면서 2022년 8월 9일 수도권의 집중호우가 가장 충격이었다고 회고했다. “서울에 시간당 100mm 이상 비가 쏟아지던 날 밤새 일했어요. 그런 비는 처음이었죠. 가장 인프라를 잘 갖췄다는 이 도시가 ‘물지옥’ 같았어요.” 나는 그에게 한탄했다. 날씨 예보가 아니라 중계만 가능한 불확실한 기후 시대 아니냐고. 그는 여름날 하늘의 구름을 본 적 있느냐고 되물었다. “뭉게구름은 단 몇 분 만에 하늘 높이 치솟기도 하죠. 그만큼 기상 현상은 단 몇 시간 만에도 다양하게 바뀝니다. 그래서 2~3일 전에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려워요. 기상청에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도록 시간과 공간별로 상세하게 6시간 초단기 예보를 낼 뿐 아니라, 긴급재난 문자 발송 시스템을 통해 극단적인 날씨를 알리고 있어요. 이미 우린 날씨 예보와 중계를 모두 하고 있는 셈이죠.”

알다시피 근본 문제는 날씨 예보가 아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António Guterres) 유엔 사무총장은 올해 6월 13일 G7 정상회의를 앞두고 이렇게 말했다. “올해는 기후 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갈 출구가 필요하다.” 사실 그는 여름이면 경고해왔다. 지난해에는 “지구가 끓고 있다”, 2022년에는 “인류의 공동 대응이냐 집단 자살이냐,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선언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도 지옥, 집단 자살 같은 과격한 단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저널리스트 제프 구델(Jeff Goodell)이 최근 발간한 <폭염 살인>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오전 7시, 집 근처로 하이킹을 갔다가 열사병으로 사망한 가족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뒤이어 폭염에 죽고 고통받는 사례가 수없이 이어진다. 그는 이 책의 목적이 독자가 더위를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거라고 말한다. “온도계 눈금이 점점 올라간다거나 봄이 서서히 여름으로 바뀌는 식의 더위가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더위는 적극적인 힘, 철로를 휘게 한다거나 목숨이 위태롭다는 사실을 알아챌 새도 없이 나를 죽일 수도 있는 그런 힘이다.” 온난화로 기온이 1도씩 올라갈 때마다 물가가 치솟고 자살률, 강간, 폭력 범죄가 늘어난다고 덧붙여 경고한다.

더위는 폭주 중이다. 기후 과학자 제케 하우스파더(Zeke Hausfather)는 “완전히 미쳐 돌아가는 날씨”라고 했다. 서울도 올해 역대급 더운 여름을 예고했다. 이 뉴스에 달린 댓글. “매번 역대래. 이러다 죽을 땐 불지옥일 듯.” 대댓글은 “결국 올여름이 가장 시원하다는 얘기”.

자조적인 댓글에서 무력감이 느껴진다. 대부분 기후 위기를 인식하지만 익숙해져 간다. 일상생활에서 기후 변화의 영향을 체감하는 사람은 전체의 87%다. 5명 중 1명은 ‘매우 체감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2019년에 비해 6%(체감한다), 17%(매우 체감한다) 낮아졌다. (한국리서치 ‘여론 속의 여론’ 팀, 5월 전국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 대상)

나도 마찬가지다. 더위 때문에 휴가지로 이탈리아 남부가 아니라 북유럽이 뜬다는 여행 트렌드 기사나 다룬다. 폭우 예보가 있던 날 아끼는 마르니 원피스를 입고 외출했듯이, 홍수든 더위든 나와는 상관없는 소동극으로 여겼다. 살면서 폭염을 크리처물급으로 경험한 적도 없다. 초등학교 때 운동장에서 교장 선생님의 긴 조례사를 듣다가 혼미해지고, 해변에서 태닝하다 1도 화상을 입은 정도였다. 심지어 3년 전에야 집에 에어컨을 들였다. 지하철과 버스, 회사에선 냉방이 잘되고 퇴근하면 밤이었으니까. 지금 나는 사무실이 추워 숄로 몸을 휘감고 있다. 옆자리 후배는 따뜻한 차이 티 라테를 마신다.

폭염은 불평등하다. 야외 작업자들, 창문 없는 쪽방에서 사는 노인들, 폭염은 힘없는 사람들을 먼저 탈락시킨다. 운 좋은 사람들은 기기의 도움을 받아 선택적으로 여름을 나고, 그런 기술을 파는 기업은 이윤을 남긴다. 그들은 실내에 앉아 실외에 있는 사람을 안쓰럽게 쳐다본다. 나는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릴 때도 구청에서 설치한 그늘막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하지만 선택지가 없는 상황은 누구에게나 올 수 있다. 또한 더 강력하고 빈번해지는 폭염이 결국 평등하게 권력을 휘두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무엇을 할까. 기후 소송을 하면 뭐가 달라지나. 환경 단체가 고흐의 ‘해바라기’에 수프를 뿌린다고 사람들이 각성하나. 아트선재센터에서는 <피곤한 야자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예술가들이 야자수를 소재로 한 작품은 식물도 파업하는 현 지구를 풍자한다. 작품 사이를 거니니 더 침잠해진다. 무슨 소용인가. 2017년 미국심리학회는 기후 우울증을 이야기했다. 기후 현상을 보며 느껴지는 불안·스트레스·무력감 등을 일컫는 용어다. ‘비발디의 사계 2050’의 멜로디가 딱 이러하다. 300년 전 작곡한 ‘사계’를 2050년 각 지역의 기후 데이터를 반영해 인공지능(AI)이 편곡했다. 봄 악장의 발랄한 새소리는 전자음으로 지저분해지고, 여름 악장은 길어졌다. 빈번한 타악기가 강렬해진 태풍과 폭염이다. 이는 도시별로 편곡됐는데, 해수면 상승으로 잠기는 지역은 무음이다. 2019년부터 독일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계속되고 있다. 각성한 누군가는 계속 무언가 하고 있다. 다시, 그렇다면 나는? 맨홀에 빠진 여성을 잡았을 때의 흠뻑 젖은 촉감과 그녀를 내보내지 않던 물살의 힘을 기억하려 한다. 한때의 악몽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임을. 우선 그날부터 잊지 않겠다. (V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