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정치의 새 소식통, 텔레그램 메신저 채널들
2017년 1월 중순 러시아 연방 채널 ‘로시야 24’에서는 기이한 장면이 펼쳐졌다. 세 명의 기자가 복면 남성과 스카이프로 대화를 주고 받고 있었는데, 남성은 기자들의 질문에 컴퓨터로 변조된 목소리로 간단하게 답했다. 남자는 ‘네지가리(Незыгарь)’라는 이름으로 소개됐다. 그는 텔레그램 내 익명의 동명 채널 저자로, 러시아 정치와 관련한 ‘전문가 정보’가 이 채널에 실린다고 말했다.
‘네지가리’라는 이름은 ‘크렘린 궁의 모든 사람(Вся кремлёвская рать)’이라는 책을 쓴 미하일 지가리(Михаил Зыгарь)를 연상시킨다. 이 책에서 지가리는 익명 인터뷰를 바탕으로 러시아 정치 고위층을 둘러싼 급변들에 관한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준다. 텔레그램 채널의 저자도 비슷한 방식으로 활동한다. 따라서 원래 그는 “나는 지가리가 아니다”라고 강조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네지가리’는 ‘로시야 24’에 “정치 저널리즘이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며 “나는 신문들이 모두 사무실을 닫고 텔레그램 채널로 전환하기를 촉구한다. 여기가 더 정직하다”고 주장했다.
러시아 페이스북, '브콘탁테(Vkontakte, vk.com)'의 성공 비결
하지만 다음 날 ‘네지가리’의 채널에 등장한 ‘네지가리’는 복면도 쓰지 않고 인터뷰도 하지 않는다,. 그 뒤 ‘로시야 24'에 ‘네지가리’를 사칭한 사람이 출연했다는 메시지가 떴다. ‘네지가리’를 둘러싼 장난은 이 채널이 ‘네지가리’라는 필명 뒤에 숨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구냐를 둘러싼 여러 추측에 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
막후에서 흘러나오는 소식들
2015년 11월 등장한 ‘네지가리’는 현재 약 3만3000명의 청취자를 거느리고 있는 가장 인기 있는 텔레그램 익명 정치 채널이다. 하지만 이 채널만 유일한 것은 아니다. 채널마다 고유한 특성이 있다. ‘네지가리’는 관리들의 사퇴와 임명에 담긴 의미를 풀이하며 권력 내부 그룹들의 투쟁을 설명해 줄 뿐만 아니라, 예를 들면, 2017년 가을 국제축구연맹(FIFA)이 러시아의 월드컵 개최권을 박탈할 것이라는 등 선정적 예측을 내놓기도 한다. 이런 예측들이 항상 들어맞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네지가리’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또 다른 대형 익명 채널인 ‘메토디치카’(청취자 1만5500명)는 역사 기행과 과거 언론에 발표되지 않은 독점 정보를 인용해 정부와 의회, 기타 부처들의 ‘막후 활동’에 대한 설명을 전문으로 한다. 다른 정치 채널들도 많이 있다.
러시아 관리들은 텔레그램 좋아해
그러나 아무리 인기가 있는 채널이라 해도 전통 미디어와 비교할 수는 없다. 이들 채널 청취자가 수 만 명이라고 해도 예를 들면 러시아 ‘제1채널’ 방송 시청자는 1000만 명 이상이다. 하지만 텔레그램 정치 채널들은, ‘네지가리’의 말에 따르면, 모든 사람을 끌어 모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들이 겨냥하는 대상은 정치에 관심 있는 사람들, 특히 저널리스트와 정치학자, 관리들이다.
관리들은 텔레그램에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지방 인터넷 언론사인 ‘Ura.ru’는 내부 소식통들을 인용,”장관과 주지사들이 ‘네지가리’와 ‘메토디치카’를 읽으면서 영향력 있는 채널들에 올라온 기사들을 언론보다 훨씬 더 주시한다”고 지적했다. 한 부처의 직원은 “언론은 무시할 수 있다고 하지만, 텔레그램 채널들은 상관들(이들도 텔레그램을 읽는다)에게 올라가는 보고서 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어느 주지사 사무실의 소식통이 Ura.ru에 말한 바에 따르면, 지방 정치인들은 텔레그램에서 익명의 ‘누설 정보’들을 읽으면서 연방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 소식통은 “크렘린 궁 관리자들이 우리에게 내부 정보를 주지 않고 지방 엘리트와도 협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텔레그램 채널들이 가장 믿을 만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정보 소식통이 되고 있다.
근거 없는 정보
'IT 시장 독점 심화...독점 완화, 공정 경쟁 필요'니키포로프 러 정통부 장관
일부 인기 있는 정치 채널 운영자들은 이름을 숨기지 않는다. 그중 가장 인기 있는 채널은 정치평론가인 레오니드 다비도프의 ‘다비도프.인덱스(Давыдов.Индекс)’(구독자 2만3500명)이다. ‘lenta.ru’와의 인터뷰에서 다비도프는 “내겐 익명성이 필요 없다”며 “이름과 평판 있는 사람이 쓴 기사들을 사람들이 더 많이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다비도프는 익명의 동료들이 더 많은 자유를 갖고 있음을 인정했다. 그는 “물론, 내가 내 이름으로 채널을 운영한다면, 어떤 경계를 설정해야만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자기검열로 간주하지만, 나는 이것이 상식이라고 말하고 싶다”고 설명했다. ‘네지가리’나 ‘메토디치카’엔 그런 한계가 없다. 이런 저런 정치인에 관한 기사들은 심각한 명예훼손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런 내용은 문서 같은 것들로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것들이다. 익명의 저자들은 이들 내용의 출처를 절대 밝히지 않는다.
커뮤니케이션 홀딩 ‘민첸코 컨설팅’ 회장인 정치공학자 예브게니 민첸코는 Russia포커스와의 인터뷰에서 “텔레그램에 익명으로 등장하는 명예훼손 내용을 입증하기가 불가능하다”며 “저자도 출처도 알려져 있지 않은 익명 채널들의 정보를 믿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익명성의 매력
‘네지가리’나 ‘메토디치카’의 정확성을 입증하는 것은 실제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들의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높아만 간다. 전문가들은 러시아 정치가 매우 폐쇄적이어서 독자들이 내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면 어떤 소식통이든지 관심을 보인다는 점에서 원인을 찾고 있다.
정치학자인 미하일 카랴긴은 “자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검증되지 않은 정보라도 믿는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다른 정치학자인 발레리 솔로베이 모스크바국립국제관계대학교 교수도 카랴긴의 의견에 동의하며 “크렘린은 자신의 계획에 관한 정보를 우리에게 절대로 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은 뭔가를 알고 싶어한다. 그래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는 소식통이라면 그것이 무엇이든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인다” 고 말했다.
그는 “익명의 텔레그램 채널들이 ‘누설 정보’를 중심으로 제작되며 따라서 독자들에게 비밀에 접근하고 있다는 느낌을 심어주는데, 이는 항상 효과가 있었다”면서 “텔레그램 채널은 익명이기 때문에 공식적이고 비익명적인 소식통보다 더 정확하고 믿을 만한 것처럼 보인다. 전통적 언론이 정부 부처 내 ‘정보 소식통’을 인용할 때도 그렇게 보이지만 그게 다였다”고 말했다.
참고
텔레그램은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프콘탁테’를 설립한 파벨 두로프가 만든 메신저이다. 이 회사 서버들은 러시아 안에 있지 않으며 텔레그램 제작자는 이 메신저를 정보의 비밀성 측면에서 가장 안전한 메신저로 정립시키고 있다. 2017년 초 텔레그램 의 적극적 이용자 수는 러시아에서 600만 명을 넘어섰다. 2015년 9월 출범한 텔레그램 채널들은 사실상 블로그 플랫폼에 가깝다. 하지만 SNS와 달리 텔레그램은 논평과 ‘좋아요’ 기능이 없다. 채널 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저자의 메시지를 다른 곳으로 퍼서 게시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