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 복무’가 가능했던 19세기 러시아 군대
표트르 1세 재위 시기, 정확히는 1699년부터 러시아에서는 정규징집 차원에서 국가의 전 사회계층 구성원에 대한 신병 모집이 이뤄졌다. 목적은 러시아 최초 황제가 수 년에 걸친 전쟁을 앞두고 러시아군 병력을 늘리는 것이었다.
귀족들은 어떻게 병역면제 권리를 쟁취했는가
특권층과 하류층의 징집은 판이하게 달랐다. 귀족은 개인별로 국방 의무를 졌다. 그런데 귀족과 달리 국가에 직접세인 인두세를 납부하는 도시거주민과 농민의 경우에는 징병에 공동체적 특징이 있었다.
다시 말해, 공동체가 직접 군에서 여생을 보낼 사람을 선정했다(원래는 평생 복무였음). 국가는 오직 병사의 수와 그들의 신체적 적합성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병사 모집 대상은 20~35세였다.
16세기의 러시아 대귀족. 출처: 알렉산드르 비스코바토프
귀족들은 자신들의 복무 조건을 간략화하는 데 재빨리 성공했다. 처음에는 귀족 가문 형제 중 1명의 복무 면제가 허락됐고, 다음에는 복무 기간이 25년으로 제한됐으며, 1762년이 되자 귀족들은 징집에서 완전히 해방됐다. 표트르 3세가 즉위 직후 이와 같은 결정을 내렸는데, 귀족의 지지를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납세(즉 인두세를 납부하는) 계층의 복무기간은 18세기 말에 가서야 최대 25년으로 줄었다. 1830년대에 병사들은 20년씩 복무했다. 그러나 제대한다 해도 또 5년의 ‘휴가’가 있었는데, 이 기간 중 다시 군대로 불려갈 수도 있었다. 이 기간이 끝나야 병역의무를 완전히 이행한 것으로 여겨졌다.
신병 모집은 특별명령을 통해 대략 연 1회 공고됐다. 러시아가 중요한 전쟁에 참가하면 1년에 여러 차례 신병을 모집했다.
공동체는 어떻게 신병을 선정했나
18세기, 러시아 졸병들. 출처: 알렉산드르 비스코바토프
하층민 중에서 우선적으로 군대에 간 이들은 일꾼의 수가 충분한 대가족의 구성원들이었다. 평민, 그리고 핵심적으로는 최다 계층인 농민의 경제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 다음 미래의 병사들은 별도로 지정된 장소에서 의사의 검사를 받았다. 군인이 될 사람의 키는 2아르신(약 150cm) 이상이어야 했으며, 뚜렷한 신체적 결함이 없고 치아상태가 좋아야 했다. 이는 정상적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주요 지표 중 하나로 여겨졌다.
병사로 선발된 자들은 앞머리를 밀었는데, 도주해도 숨기 어렵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선발되지 못한 자들은 반대로 뒤통수를 밀었다. 실수로 또는 고의로 누군가를 대신 군대에 보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
19세기, 러시아 신병들. 출처 알렉산드르 비스코바토프
군인은 결혼을 해도 무방했지만 연대장의 동의가 필요했다. 군인의 자식과 미망인에게는 국가로부터 혜택이 제공됐다. 기준 연령에 달한 군인의 자식은 스스로 군대에 가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대리 복무 방법
그러나 장기 복무는 인기가 없었다. 많은 이들이 징집을 피하려 노력했다. 게다가 징집을 피할 방법도 있었다. 돈으로 자기 대신 다른 이를 군대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1831년 징집 규정에는 그렇게 쓰여 있었다. 이 규정에 따르면 ‘지원병(охотник)’, 즉 군대를 가기로 정해진 사람을 대신해 복무하고자 하는 자는 자발적으로 군대에 가야 한다. 자발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면 불법이었고, 자기의 뜻에 따라 간다는 것을 문서로도 남기고 공동체 구성원들도 확인했다. 그가 공동체로부터 이탈해도 나머지 공동체 구성원 및 국가에 대한 그의 의무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군대에 가지 않으려면 징집 대상자는 500~600 루블 은화(약 571만원~686만원)를 지불해야 했는데, 당시로는 적지 않은 돈이었다. 이 돈의 2/3을 ‘지원병’이 받고 나머지는 국가와 그 지원병의 부인(있을 경우)이 받았다.
니콜라이 네브레프 화가가 1869년에 그린 '군인이 집에 돌아왔다' 작품. 출처: 드네프라페뜨롭스크 미술관
이러한 조건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따라서 수 십 년씩 복무할 ‘지원병들’이 많지는 않았다. 19세기 중반 병력은 100만 명이 넘었는데 ‘지원병’은 기껏 연 1만 명 정도였다.
그러나 ‘지원병’ 고용주가 군대에 가지 않은 유일한 범주는 아니었다. 19세기 중반에는 약 3000만 명의 납세 계층 중 600만 명이 징집에서 면제됐다. 여기에는 상인, 도시의 명예시민, 특정 지역 거주자들이 포함됐으며 이들 중 상당수는 제국의 팽창과정에서 러시아로 편입된지 얼마 안 된 지역의 사람들이며 병역 면제 특례를 받은 자들이었다. 19세기 중반 즈음에는 이렇듯 전 계층 복무에 관한 표트르 1세의 원래 생각과 너무 멀어져 버렸다.
전시에 쉽게 보충될 수 있는 대규모 군대가 필요했던 러시아는 다른 나라, 특히 프랑스와 프로이센의 경험을 모방해 1874년 국민개병제를 채택했다. 징집군과 함께 중세 유럽의 특징적 벼사였던 고용병-‘지원병’ 형태도 과거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