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이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진다면
와인이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때, 그럼에도 당신은 왜 와인을 마시려고 하는가? 스스로 답을 구하기 힘들다면, 멋진 소믈리에를 수소문해 찾아가보자.
글 / 이정윤(다이닝미디어아시아 디렉터)
레스토랑에서 음식을 몇 가지 주문하고 와인 리스트를 훑어보다 예산에 맞게 적당해 보이는 와인을 주문해 마신다. (유튜브에 ‘Second Cheapest Wine’을 검색해보라! “언젠가의 내 모습”이라며 깔깔 웃을 수 있다.) 어차피 대단한 와인 추천을 받는 게 아니라면, 누군가에게 소믈리에는 그저 ‘와인 따라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와인 전문가라는 허울 좋은 수식어도 모두 무색하게 느껴진다.
와인은 특수한 음료다. 주스든 맥주든 병입되어 판매되는 대부분의 음료는 균질함의 미덕을 갖췄다. 하지만 와인은 서빙 온도, 서빙하는 글라스의 형태, 그리고 어떻게 다루는지에 따라 맛과 향이 크게 달라진다. 그래서 와인을 잘 아는 전문가의 가이드는, 브랜드와 빈티지가 같은 와인에도 훨씬 더 큰 가치를 선사한다. 소믈리에는 와인의 품종과 생산자 등 방대한 기본 지식을 배경으로, 와인을 서빙할 시점의 정확한 상태를 진단한다. 아직 시음 적기에 이르지 않은 와인은 좀 더 빨리 본모습을 보여줄 수 있도록 공기와 접촉해 디캔팅을 하고, 한풀 꺾인 와인은 온도를 조절하거나 잔의 형태를 조절하는 등 가능한 최선의 모습을 찾아낸다. 그래서 소믈리에는 셰프만큼이나 중요하다. 막내 요리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주방에 식재료만 던져둔다고 대단한 요리가 나올 수 없듯, 훌륭한 소믈리에가 없으면 와인 리스트는 그저 마트의 와인 진열대나 다를 바 없다. 대략적인 지역이나 들어본 듯한 생산자의 이름을 떠올리며 와인을 짐작해 주머니 사정대로 와인을 고를 확률이 높다. 와인을 마시긴 했지만 별 기억이 나지 않는 날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소믈리에에게 관심을 가져볼 타이밍이다.
최고의 셰프를 수소문하듯, 특별한 와인 경험을 위해 인정받는 소믈리에를 찾아보자. 최근 미쉐린 가이드, 월드 베스트 레스토랑 같은 대부분의 레스토랑 평가 기관에서 훌륭한 소믈리에를 선정해 발표하기 시작했다. 미쉐린 가이드 서울&부산 2024에서 올해의 소믈리에로 선정된 빈호의 김진호 소믈리에는 와인을 정말 맛있게 “제안”한다. 고객의 취향을 뛰어넘는 것이 가장 큰 포인트다. 항상 부르고뉴 와인만 최고라고 외치던 고객도 빈호의 음식에 꼭 맞춘 듯, 입 안에서 폭발적인 맛의 조화를 선사하는 슬로베니아 와인 한 모금을 들이켜면 단숨에 설득된다. 수십만 가지에 이르는 와인 중 몇 가지를 선정해 여행지를 넘나들 듯 이야기를 엮어내는 그의 능력은 소믈리에의 여부가 음식을 경험하는 데 훨씬 더 특별한 가치를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세계의 방대한 와인 중 무엇을 마실까에 대해, 소믈리에의 추천을 따르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더 즐겁고 맛있는 일이다.
와인이 정해져 있어도 소믈리에의 역량에 따라 경험이 달라진다. 이미 와인리스트가 선정된 ‘와인 디너’가 대표적이다. 라망시크레의 최은혜 소믈리에가 PYCM 와인 디너에서 그랬듯, 정말 잘하는 소믈리에들은 고객이 와인을 마시는 시점을 완벽하게 계산해 조절한다. 행사 전 샘플 보틀을 테스트하거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도 지식을 동원해 와인을 오픈할 시점을 정한다. 6시간, 혹은 하루 전에 병을 오픈해 두기도 한다. 표현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글라스를 정하고 온도를 관리한다. 정확한 레시피로 요리하듯, 소믈리에는 다양한 변수를 다루며 계획 속의 맛을 현실에 그려낸다. 물론 형편없는 소믈리에도 있다. 모 레스토랑에서, 명망 있는 생산자의 값비싸고 좋은 와인 디너였는데 온도도 맞지 않았고, 디캔팅이라도 충분히 했으면 더 화려한 향이 피어났을 텐데 서빙 직전에 코르크를 따 병 그대로 서빙하니 좋은 퍼포먼스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눈치 빠른 와인 애호가들이 소믈리에를 보고 디너를 예약하는 것이 놀랍지 않다.
최근 소믈리에의 활약은 파인 다이닝이나 양식 레스토랑을 뛰어넘어 스시야로 닿고 있다. 섬세한 핸들링이 필요한 고가의 와인이 소비되는 곳 중 하나가 스시야인데, 이전까지 스시야에 전문 와인 소믈리에가 상주하는 곳은 거의 전무했다. 최근 예약하기 어렵기로 악명 높은 스시 하시라는 주류 페어링으로도 유명하다. 참치 등살에 섬세한 부르고뉴 레드 와인이나 우니 스시에 샤토 디켐을 페어링하는 김호석 소믈리에는, 하시라가 오픈하던 때 이곳에 고객으로 방문해 식사를 한 뒤 셰프에게 함께 일하고 싶다고 제안했다. 그렇게 팀에 합류해 와인과 니혼슈, 칵테일을 넘나드는 10여 잔의 페어링을 선보이며 독창적인 메뉴를 함께 선보인다. 그야말로 ‘음료 요리사’인 셈이다. 소믈리에가 있으니 와인을 반입하는 경우에도 훨씬 더 좋은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는 것도 업장의 장점이 되었다.
와인을 맛있게 요리하는 소믈리에의 역할은 결국 와인 매출로 이어진다. 주류 매출이 레스토랑 매출의 5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면 안정적인 경영에 큰 도움이 된다. 그래서 소믈리에가 업장의 요리 스타일과 찰떡같이 어울리는 매력적인 와인 리스트를 만들고, 고객들이 즐겁게 와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고, 어떤 와인을 고르든 최상의 상태로 즐길 수 있게 서비스할 능력이 있다면 자연스레 와인 매출이 늘어난다. 와인쟁이들이 입을 모아 “와인 마시기 제일 좋은 업장”으로 손꼽는 한남동 세스타의 이창근 소믈리에가 선보이는 와인 서비스는 이 모든 미덕을 두루 갖추었다. 그 성적표는 매출로 드러난다. 주류 주문이 필수가 아닌데도 와인 매출이 60퍼센트에 이르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소믈리에가 레스토랑의 홀을 대표하는 얼굴로 고객을 만나고, 와인을 멋지게 서비스하며 자신만의 접객 스타일을 갖추다 보면 개인적인 팬층을 형성하기도 한다. 스와니예, 다이닝 인 스페이스, 무오키 등 스타 레스토랑을 거치는 동안, 홍경식 소믈리에를 따라 레스토랑을 방문해온 고정 팬층이 상당수 있으니 흥미롭다.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요인이 단순히 셰프와 요리가 아니라 소믈리에와 서비스가 될 수 있다는 증거다. 지금은 레스토랑 플럭스와 와인 숍을 오가는데, 숍에서도 홍경식 소믈리에가 일하는 날은 매출이 5배에 이르기도 한다며 놀라워한다. 자신의 캐릭터를 잘 살린 와인 서비스는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셰프들이 입버릇처럼 “괜찮은 소믈리에를 알게 되면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남발하는 게 놀랍지 않은 까닭.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수요는 많고, 사람은 부족하다. 한국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소믈리에는 매니저를 겸한다. 홍콩이나 뉴욕처럼 레스토랑 산업이 크게 발달한 도시에서는 레스토랑 서비스와 경영 전반을 관리하는 총괄 매니저와 전문적인 와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소믈리에가 나뉘지만, 레스토랑의 서비스 인력난이 심한 서울에서는 이 두 역할을 결부한 형태가 대다수다. 그래서 업무가 많고 전문적인 와인 영역에 집중할 시간이 부족해지기도 한다. 레스토랑 오너도 괴롭기는 마찬가지다. 매니저 겸 소믈리에를 뽑았는데 자신은 와인에만 집중하고 싶으니 고객 관리나 매니징 업무를 시키지 말라고 선을 그으면 함께 일하기 어렵다. 과중한 업무 속에서 여러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이런 혹독한 환경에서 정답은 없겠지만, 올해의 소믈리에로 꼽힌 김진호 소믈리에는 “결국 이 직업도 근본적으로는 서비스인”이라며, 홀 직원의 일부이자 리더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전한다.
와인이 어렵게 혹은 지루하게 느껴질 때, 그럼에도 당신은 왜 와인을 마시려고 하는가? 스스로 답을 구하기 힘들다면, 멋진 소믈리에를 수소문해 찾아가보자. 어쩌다 이 까다롭고 흥미로운 술이 ‘신의 물방울’이라는 별명까지 얻게 되었는지 비로소 고개를 끄덕이게 해 줄 즐거운 와인 경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샴페인은 항상 얇고 긴 잔에 마시는 줄 알았는데 사과처럼 둥글고 커다란 잔을 가져와 서빙하기도 하고, 레드 와인을 차갑게 칠링해주기도 하는 소믈리에들의 와인 요리를 즐기다 보면 그 매력에 점점 빠져든다. 산업도, 인력도 결국엔 공생 관계이기에, 그 매력을 직접 경험할 사람들이 있어야 더 좋은 전문가들이 탄생하고, 그 전문가들이 있어야 더 많은 고객을 끌어들이니까. 함께, 오래도록 좋은 와인 서비스를 즐기고 싶다.